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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노영 ( 姜老永 )

    출생일 : 1887.10.04 출생지 : 경기도
    자료연대 : 무단 통치기(1910~1919) 행위분야 : 경찰
    친일행적 : - 1912년 11월부터 경부를 겸임.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17년 전라북도 고창경찰서 경부를, 1918년부터 전라북도 전주경찰서 경부를 지내다 1919년 12월 퇴직.
  • 강대철 ( 姜大喆 )

    출생일 : 1882.08 출생지 : 경기도 진위
    자료연대 : 무단 통치기(1910~1919) 행위분야 : 관리
    친일행적 : -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20년 10월 군수로 승진해 충청남도 청양군수로 부임. - 1923년 3월 보령군수를, 1925년 5월 홍성군수를, 1927년 3월 당진군수를 지냄. - 1928년 3월 훈6등 서보장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29년 10월 황해도 평산군수로 옮겨 근무하다 1931년 3월 퇴직.
  • 김상용 ( 金尙鎔 )

    출생일 : 1902.08.27 사망일 : 1954.06.22 출생지 : 경기도 연천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기타
    친일행적 : - 1938년 6월 이화애국자녀단(梨花愛國子女團)이 발족하자 간사로 활동. 이화애국자녀단은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내조적 역할을 공고히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단장은 김활란(金活蘭). - 1939년 10월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을 위해 조직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 1941년 9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 - 1942년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연예단체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조선연예협회를 조직하고 연예각본을 모집할 때 심사위원으로 참여. - 1942년 2월호 반도의 빛(半島の光)에 일제가 ‘근로보국(勤勞報國)’의 취지로 추진하던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에 적극 호응해 학생들의 ‘근로봉사’를 독려하고 그 교육적 중요성을 역설하는 글 「땀의 기쁨」을 발표. - 1942년 2월 15일부터 매일신보가 ‘신가파(新加坡)의 함락과 문화인의 감격’이라는 주제로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명사들의 글을 연재할 때, 같은 해 2월 19일자에 「성업(聖業)의 기초완성」이라는 글을 통해 “해방의 성업이 오늘로 일반(一半)을 이룬 것이다. 여기 사항락(獅港落 : 싱가포르항 함락) 쾌보를 듣는 나의, 우리의 넘치는 희열이 있다.” 라며 일제의 승전을 축하. - 1943년 8월 1일부터 8일까지 매일신보가 ‘조선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주간’에 맞춰 1면 특집으로 유명 문인과 화가의 시화인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연재할 때, 8월 4일자에 다음과 같은 시를 기고해 징병제를 찬양. “물결 깨어지는 절벽 이마 위 / 가슴 헤치고 서서, 해천(海天) 향해 휘파람 부는 듯, / 오랜 구원 이룬 이날의 기쁨이여! / 말 위에 칼을 들고 방가(邦家)의 간성(干城)됨이 / 장부의 자랑이거늘, 이제 불리니 / 젊은이들아 너와 나의 더 큰 광영이 무어랴. / 나아가는 너희들 대오에 지축이 울리고, / 복락의 피안으로 깃발은 날린다. / …… / 충(忠)에 죽고 의(義)에 살은 열사의 희원, / 피로 네 이름 저 창공에 새겨 / 그 꽃다움 천천만대에 전하여라.”
    김상용 사진
  • 김승구 ( 金承久 )

    출생일 : 1914 사망일 : 1994.11 출생지 : 경기도 수원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예술인
    친일행적 : - 1939년 6월 안기석•이서•이화삼•박학•이백산 등과 함께 친일연극을 표방한 극단 협동예술좌를 만들면서 연극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섬. 협동예술좌는 결성 당시 ‘신극단체의 대동단결과 극단의 경제문제 해결 및 국민정신을 실천적으로 파악한 국민예술가로서의 활동’을 목적으로 표방함. 당시 언론보도에서는 “협예(협동예술좌)는 그들의 선언과 같이 스스로 금일의 시국과 정세를 가장 충분히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이 같은 시국과 정세에 가장 적합한 연극부대로서 확호한 슬로건과 기치를 선두에 내걸고 행진을 선언한 신집단이었다. …… 모든 과거의 주의나 주장을 깨끗이 포기하고 다만 제국신민으로서의 시대적 인식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여기에 상응한 각본을 준비하 협동예술좌는 동양지광사를 주재하던 박희도의 전격적인 후원 아래 결성.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는 일문 종합지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황민화 운동에 앞장 선 인물. 김승구는 협동예술좌의 창립 공연 작품 「동풍」(「울부짖는 중국」의 번안)을 집필. - 1941년 3월 결성된 극작가동호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 2월 자신이 쓰고 연출한 가극 「춘향전」을 반도가극단을 통해 공연. 그해 11월 부여신궁어조영(夫餘神宮御造營)의 문화인봉사대(文化人奉仕隊)에 동원되어 활동. 이후 본격적인 친일 연극 창작에 나서 1943년 11월 현대극장과 약초극장에서 공연된 「로나부인 행장기」(ロナ夫人行狀記)의 대본을 씀. 이 작품은 일본어로 창작된 이른바 ‘국어극’. 조선연극문화협회는 1943년 4월부터 경무과의 지도와 명령에 따라 부(府) 이상의 도시에서 공연되는 작품 중 삼분의 일 이상은 일본어로 쓰인 국어극을 공연하도록 조치했고, 이어 10월에는 국어극 연구부를 설치하여 다가올 일본어 상용화에 대비. 「로나부인 행장기」는 이러한 지도와 명령에 따라 창작된 작품. 1944년에는 「화전지대」를 집필하여 안영일의 연출로 공연. - 대표 작품인 「산하유정(山河有情)」은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주관하고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국민총력조선연맹과 매일신보사•경성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주최한 관제 행사인 제3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단체상(조선총독상)과 작품상을 받음. 극단 아랑이 안영일 연출로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1945년 2월 중앙극장에서 초연, 연극경연대회 총독상 수상을 기념하여 4월에 재공연. 3막 4장으로 구성된 「산하유정」의 내용은 제목처럼 조국 산하에 흐르는 따뜻한 인정을 다루고 있으나 작품 속 출정군인 다나카 긴타로(田中金太郞) 부자가 조선인에게 보여준 온정이 작품 전체를 묶어내는 중심 틀로 작용하면서 신체제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는 목적을 드러냄.
    김승구 사진
  • 김일해 ( 金一海 ; 창씨명: 금용정석 金用正錫 )

    출생일 : 1906.12.20 사망일 : 2004.07.11 출생지 : 경기도 수원
    자료연대 : 문화 통치기(1919~1931) 행위분야 : 예술인
    친일행적 : - 일제의 영화통제가 강화되던 1930년대 말부터 전쟁지원을 위한 각종 정책에 적극 협조. 1939년 영화인 등록제가 실시되자 영화배우로 등록했고, 1941년 조선영화인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친일영화의 주요 배역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 - 출연한 영화로는 1941년 고아들을 돌봐 일본제국주의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내용으로 고려영화협회 제작, 최인규 연출 「집 없는 천사」(家なき天使), 조선영화령의 실시에 맞춰 영화통제와 영화기업화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명보영화사(明寶映畵社) 제작, 이병일(李炳逸) 연출 「반도의 봄」(半島の春), 그리고 지원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안석영(安夕影) 연출 「지원병(志願兵)」, 1942년 애견을 팔아 국방헌금을 내는 내용으로 조선영화사 제작, 김영화(金永華) 연출 「우르러라 창공」(仰げ大空) 등의 극영화와 1939년 “내선일체의 정신을 스스로 몸으로써 나타낸 고 이원하(李元夏) 옹의일생을 그린” 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의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國旗の下に我死なん) 등의 문화영화에 출연. - 1942년 조선총독부의 통제영화사로 설립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기과 사원으로 입사한 후, 이곳에서 제작한 전쟁동원영화 「조선해협(朝鮮海峽)」, 「거경전(巨鯨傳)」, 「헤이따이상」(兵隊さん, 병정님), 「우리들의 전장」(我等の戰場)에 출연. - 친일영화에서 이성적인 사고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주인공의 후원자 역을주로 연기. 「집 없는 천사」에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목사, 「반도의 봄」에서는 제작비가 없어 좌초하게 된 영화를 위해 노력하는 영화인, 「지원병」에서는 지원병으로 입대하기로 한 주인공의 가정을 돌봐 주기로 한 인물. 노골적인 선전영화인 「조선해협」에서는 지원병의 완고한 아버지, 「헤이따이상」에서는 전선으로 향하는 지원병의 든든한 큰형, 수산증산을 독려하는 「거경전」에서는 포경회사의 중역인 요도(淀島) 전무 역을맡음.
    김일해 사진
  • 김학성 ( 金學成 )

    출생일 : 1913.08.10 사망일 : 1982.11.20 출생지 : 경기도 수원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예술인
    친일행적 : - 1941년 최인규(崔寅奎)가 연출한 「집 없는 천사」(家なき天使)를 촬영. 이 영화는 거리의 부랑아를 고아원에서 교육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조선의 어린이가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림. - 1942년,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성의를 다해 영군대(令軍隊)를 맞이해 함께 총동원 체제의 생산력 증강을 도모한다는 내용의 「풍년가(豊年歌)」(방한준 감독), 교통질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선전하기 위해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에서 기획한 「명랑한 도로」(明るい鋪道) 등의 영화를 촬영. 1942년 9월 조선의 영화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촬영과 사원으로 입사. - 1943년 안석영(安夕影)이 연출한 「조선에 온 포로」(朝鮮に來た浮虜)를 최순흥(崔順興)과 공동으로 촬영. 조선군사령부가 후원한 이 영화는 조선에 수용된 영국군 포로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영화로, 정당한 포로대우를 묘사함으로써 천황의 큰 은혜를 알게 하려는 의도로 제작. - 같은 해 이병일(李炳逸)이 연출한 「반도의 소녀들」(半島の乙女達)을 촬영. 이 영화는 음악문화영화로서, “반도 일류의 가수 이난영, 이화자와 김소영, 홍청자, 김영 등이 경연한 외에 재성 각 고등여학교 학도 오천여 명이 출연, 총후 반도여성의 명랑한 풍경을 그려 음악영화의 이색편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음. - 1944년 방한준이 연출한 「거경전(巨鯨傳)」을 황운조(黃雲祚)와 공동으로 촬영. 이 영화는 조선의 청년이 일본의 청년처럼 무사도 정신을 길러 해양 일본의 전력 증강을 꾀한다는 내용. 멜로적 정서가 강하게 묻어 있는 영화이지만 주요논리는 미국에 비해 부족한 자본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자는 것임.
    김학성 사진
  • 심형구 ( 沈亨求 )

    출생일 : 1908.06.04 사망일 : 1962.08.06 출생지 : 경기도 용인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예술인
    친일행적 : - 1940년대에 들어서 미술계에도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주장이 나옴. ‘성전(聖戰)의 승리를 위해 병사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 못지않게 후방의 화가들도 미술의 무기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 그 핵심을 담은 글로 최근배의 「미술계의 제문제」(조광1939년 1월호)와 구본웅의 「사변과 미술」(매일신보 1940.7.9)에 이어, 심형구의 「시국(時局)과 미술」(신시대 1941년 10월호)이 대표적임.「시국과 미술」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쓴 글. 독일의 예를 들어가며 ‘미술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그 전문성으로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삽화나 포스터 제작에 참여해야 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 “금일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무엇이나 좀더 국민생활이라 하는 것과 직접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을 위한 문학, 미술을 위한 미술은 벌써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으로서의 국민생활을 좀더 향상시키자는 점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당연 협소한 경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반 문화인은 각자 각자가 자신의 순수한 목적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이는 예술가만을 책할 수 없겠으며, 모든 사람이 국가에 봉사한다는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하등의 목적이 없이 민족이상도 국가의식도 가지지 않는 예술이요 미술이라면 무가치한 물건이다. 한 민족의 예술이라는 것은 그 민족을 강대하게 한다는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동경에서는 …… 일류화가가 신문 삽화나 무대장치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무대장치나 삽화가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 정도가 높아졌다 한다. 즉 훌륭한 회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그와 동일한 기백으로서 삽화나 무대나 자기 기능을 충분 발휘한다는 일이 미술을 생활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즉 화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제작만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겠다. …… 필요하다면 포스터나, 책의 장정이나, 극단으로 성냥곽 레텔이라도 소위 대가가 그려도 좋겠으며 또한 그려야 될 줄 생각한다. 좁은 문을 나와서 독선고립주의는 청산해야 될 줄 안다. 결국 화가 자신들의 일층의 자각과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시국과 미술’의 관계를 밝힘. - 1943년 춘추 3월호에 기고한 「현대미술문화정책과 그 이념」에서는 ‘예술도 군수품’이며, 예술가는 ‘전적으로 전시동원에 즉응하는 행동’을 하라는 일제의 전시 문화정책에 호응하여 ‘성전완수를 위하여 강력한 국민정신을 작여하라’면서 “회화의 교화적 효능을 통일된 사상으로서 표현하여 대상의 사상을 지도하자는 것이다.”라고 주장. 이와 같은 시국미술관에 걸맞게 군국주적 경향의 삽화나 그림을 그림. 개인적으로 그린 전쟁 선양의 작품으로는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흥아(興亞)를 지키다」와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 1944년 2월호의 속표지 그림 「기관총을 쏘는 병사」 등이 알려짐. 유화인 「흥아를 지키다」는 총칼을 들고 보초를 서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고 있음. 초소에서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대동아공영의 성전’ 승리를 꿈꾸는 병사의 표정이 결연하게 묘사. 「기관총을 쏘는 병사」는 연필소묘에 담채를 가한 소략한 삽화로 기관총을 중심으로 사수와 조수의 상반신을 그린 것. 예비탄창을 들고 웅크린 조수의 자세나 적을 향한 눈초리가 매섭게 표현. - 각종 친일단체에서도 활동했는데, 1940년 12월 황도사상의 보급을 위해 결성된 황도학회(皇道學會)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 1941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여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의 서양화부에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사로 참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던 조선미술가협회에서 일본인 관료 화가들과 함께 조선인으로는 서양화부에 김은호 ․ 이상범 ․ 이영일(李英一)․ 이한복(李漢福)이, 조작부에는 김경승(金景承)이 평의원으로 선출. - 1942년 11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여 첫 전람회를 가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김인승 ․ 김기창(金基昶) ․ 장우성(張遇聖)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서 제3회(1944)까지 참가. 여기에 출품한 작품들은 「방공훈련」,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 주로 군국주의에 호응하는 것들. - 1943년 2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단광회(丹光會)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 단광회에는 당시 경성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를 포함하여 김인승•박영선(朴泳善)•김만형(金晩炯)•손응성(孫應星)•이봉상(李鳳商)•임응구(林應九)등이 참여. ‘미술보국’을 위한 대표적인 실천 사례는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이를 기념하는 기록화를 합동 제작하여 경성과 평양에서 순회전을 가진일. 단광회 회원 19명이 4개월 동안 제작한 조선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는 당시 ‘근대 반도사의 일면을 반영하는 대단히 큰 감명을 일으킨 역작’이라고 평가됨. 징병에 소집된 믿음직한 조선 청년을 중심으로 이를 전송하는 비행기를 든 소년과 조선군 보도부장, 지원병 훈련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장, 친일파 윤치호, 경기도지사 등 구체적인 인물들을 배치해 놓음. 이들 주요 인물들의 주변에는 경성 풍경과 남산의 신사(神社), 병사들의 행진, 시민들의 환송 장면을 그려 넣음. - 1944년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에는 심사원으로 참여하여 「돌격전(突擊戰)」과 「전야(戰野)」를 출품.
    심형구 사진
  • 여운홍 ( 呂運弘 )

    출생일 : 1891.09.01 사망일 : 1973.02.03 출생지 : 경기도 양평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기타
    친일행적 : -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개최된 미영타도 대연설회에 이광수(李光洙)•김동환(金東煥) 등과 함께 참석해 ‘유색인종 해방의 성전(聖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이 내용은 1942년 삼천리 1월호에 「동아공영권 건설의 성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 동양의 침략자 영•미 타도의 대사자후! 라고 소개된 이 글에서 “이번 제국이 영미에 대한 선전포고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영미의 침략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던 동양인의 동양을 건설하는 성전이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있는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힘써 싸울 것을 강조. - 1942년 조광 2월호에 기고한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 ― 신성한 의무」에서도 “이 대동아전쟁은 숭고하고 위대한 목적을 위한 거룩한 성전(聖戰)”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있는 바 가진 바 모든 것을 다 국가에 바쳐서 이 거룩한 목적을 완수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몸까지도 국가의 것으로 알아서 언제든지 국가가 부르면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나서야 될 것이다.”라고 하여 전쟁협력을 강요.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의 전망’ 좌담회에 참석. - 1943년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종로지역의 지원병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계몽행사에 실행위원을 맡아 고원훈(高元勳)•이광수•조병상(曺秉相)•한상룡(韓相龍) 등과 제2반 위원으로 활동.
    여운홍 사진
  • 유광렬 ( 柳光烈 )

    출생일 : 1899.06.27 사망일 : 1981.11.03 출생지 : 경기도 파주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기타
    친일행적 : - 1933년 매일신보사에서 편집국장 대리 겸 지방통신부장을 지냄. - 1937년 9월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선발되어 북중국의 전선을 시찰하고 10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 매일신보에 총 12회에 걸쳐 「북지전선(北支戰線)에 다녀와서」를 연재. 1938년 5월 매일신보 논설부장을 맡음. - 1940년 2월 매일신보 편집국장에 올랐지만 4월에 사직.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이후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결성식에 참석했고, 9월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해체•통합해 새로이 전쟁협력을 위한 전시 최대 민간단체로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 평의원을 맡음.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를,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맡음. - 기자와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수많은 글을 발표. 춘추 1942년 2월호에 발표한 「대전 후의 세계관」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도의 세계의 건설, 국제정의 실현, 동아의 해방과 자유라 찬미하고 필승을 축원. 또 조광 1942년 3월호 「대동아선언의 의의」에서는 하와이의 진주만 기습을 “동아를 해방케 하는 대동아전쟁”이라고 규정. 조광 1943년 9월호 「대동아전쟁의 성전 의의」에서도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 전쟁의 특질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첫째,이 전쟁은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둘째, 이 전쟁은 대동아 방위의 전쟁이다. 셋째, 이 전쟁은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군수물자 동원이나 징병•지원병, 노무동원을 통해 협력해야 한다고 선동. - 조광 1942년 6월호 「징병제 실시와 조선인의 각오」에서 “(징병제 실시) 발표를 보자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은하에 국방의 중임을 분하(分荷)하게 된 광영에 감격하고 역대의 통치 당국과 군 당국이 반도 동포를 잘 지도•계발시키어 금일의 광영에 균점케 된 데 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라며 징병제 실시를 환영. 조광 1943년 6월호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영예」에서도 “명년의 징병제를 앞두고 또다시 해군지원병제의 실시를 보게 된 것은 반도 동포의 광영으로 일시동인의 성지에 감격하여 오직 봉답에 지성을 다할 바”라면서 감격했고, 이어 “생을 이 세기적 결전시대에 타고나서 동아인의 천년 운명을 결정하는 태평양전에 나선다는 것은 남아의 본회(本懷)라 할 것이다.”라며 지원병 지원을 선동.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인 1944년 조광 1월호 「대동아전쟁 3년 ‒‒ 결전의 해인 동시에 결승의 해이다」에서는 “일억 국민은 진실로 금년이 결전의 해라는 각오하에 더욱 분투”해야 함을 역설한 뒤, 1944년을 “결전의 해인 동시에 승리의 해”로 만들기 위해 “오직 생산력 증강, 특히 적이 과시하는 공군에 대응할 비행기 기타 군수의 증산을 도모하기 위하여 총후 국민의 총력을 다할 것”을 강조.
    유광렬 사진
  • 윤효중 ( 尹孝重 ; 창씨명: 이동효중 伊東孝重 )

    출생일 : 1917.12.05 사망일 : 1967.10.19 출생지 : 경기도 장단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예술인
    친일행적 : -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미화하는 조선미술전람회,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 등에 출품하여 각종 상을 수상. 1940년에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아침(朝)」을 출품해 입선했고, 다음 해에 「정류(靜流)」를 출품해 특선을 수상. 1943년에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천인침(千人針)」을 응모하여 조선총독상을 수상. 「천인침」은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며 후방에서 끊임없이 바느질하는 한복 차림의 여인 전신상을 새긴 작품. 1944년에는 활시위를 당기는 한복 차림의 여인 전신상 「현명(弦鳴)」을 응모하여 창덕궁상을 수상했는데, 전쟁 후방인 조선에서 여성 또한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함으로써 전시체제의 기풍을 진작코자 하는 시국정신을 높이 평가받음. - 1944년 결전미술전에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父の英靈に誓ふ)를 출품. 결전미술전은 앞서 1942년부터 조선미술가협회와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총후미술전(銃後美術展)을 계승한 행사. 이 작품은 전쟁에 나가 재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의 뼛가루 상자를 멘 어린이를 소재로 삼은 것임. 군복과 같은 차림으로 상자를 앞으로 메고 있는 소년은 비애와 결연함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인데 죽음과 분노를 딛고 미래의 승리를 염원하는 주제를 표현. 이 작품은 소년을 내세워 관람객의 감성을 자극하고자 한 작품 의도를 높이 평가받아 경성일보사 사장상을 수상. - 1945년 1월부터 태평양전쟁에 출전한 공군 가미카제(神風)를 기념하는 초상조각 작업을 시작. 첫 가미카제 조각으로 당시 조선총독의 아들 아베(阿部) 소위를 선택해 제작했는데 아베 소위의 어머니이자 조선총독의 부인인 미츠코(光子)에게 연락을 취해 1945년 4월 27일 작업장소인 대화숙(大和塾) 미술료(美術寮)를 방문토록 함. 미츠코는 비서관•법무국장•형사과장의 부인을 대동하여 방문했는데 「아베소위상」의 굳게 닫은 입술에는 조국과 동포를 사랑하는 뜨거운 순정이 서리고, 불이 일듯이 허공을 노리는 눈동자에는 멀리 푸른 대공에 대한 끝없는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고 평함. 이때의 광경을 매일신보 1945년 4월 29일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함. “나즈막이 외치는 부인의 음성과 더불어 한동안 정숙이 길게 드리운다. 어머니와 아들의 그리운 대면! 비록 말은 없으되 어머니의 마음 가운데 아들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이 없는 역력한 모습이었다. 소상을 뚫어질 듯 바라다보다가 이윽고 입가에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아들의 얼굴 구석구석이 자상한 의견을 말하고 약 세 시간이나 방안에 머문 후 관저로 돌아갔다.” 이런 장면을 연출하고 난 뒤 그는 기자에게 “그의 충혼(忠魂)을 살리며 그의 무훈(武勳)을 어느 모로든지 드러내고자 애는 썼습니다마는 총독 각하께서 이를 어떻게 감상하실는지요.”라고 말함. 이어 이 작품을 총독관저에 마련한 아베 소위 위패 앞에 바칠 것이며, 육군 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松井英雄)처럼 조선이 낳은 가미카제의 흉상을 모두 만들어 나갈 의지를 천명함.
    윤효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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