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 1908.06.04
사망일 : 1962.08.06
출생지 : 경기도 용인
자료연대 :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
행위분야 : 예술인
친일행적 : - 1940년대에 들어서 미술계에도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주장이 나옴. ‘성전(聖戰)의 승리를 위해 병사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 못지않게 후방의 화가들도 미술의 무기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 그 핵심을 담은 글로 최근배의 「미술계의 제문제」(조광1939년 1월호)와 구본웅의 「사변과 미술」(매일신보 1940.7.9)에 이어, 심형구의 「시국(時局)과 미술」(신시대 1941년 10월호)이 대표적임.「시국과 미술」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쓴 글. 독일의 예를 들어가며 ‘미술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그 전문성으로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삽화나 포스터 제작에 참여해야 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 “금일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무엇이나 좀더 국민생활이라 하는 것과 직접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을 위한 문학, 미술을 위한 미술은 벌써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으로서의 국민생활을 좀더 향상시키자는 점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당연 협소한 경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반 문화인은 각자 각자가 자신의 순수한 목적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이는 예술가만을 책할 수 없겠으며, 모든 사람이 국가에 봉사한다는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하등의 목적이 없이 민족이상도 국가의식도 가지지 않는 예술이요 미술이라면 무가치한 물건이다. 한 민족의 예술이라는 것은 그 민족을 강대하게 한다는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동경에서는 …… 일류화가가 신문 삽화나 무대장치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무대장치나 삽화가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 정도가 높아졌다 한다. 즉 훌륭한 회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그와 동일한 기백으로서 삽화나 무대나 자기 기능을 충분 발휘한다는 일이 미술을 생활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즉 화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제작만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겠다. …… 필요하다면 포스터나, 책의 장정이나, 극단으로 성냥곽 레텔이라도 소위 대가가 그려도 좋겠으며 또한 그려야 될 줄 생각한다. 좁은 문을 나와서 독선고립주의는 청산해야 될 줄 안다. 결국 화가 자신들의 일층의 자각과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시국과 미술’의 관계를 밝힘.
- 1943년 춘추 3월호에 기고한 「현대미술문화정책과 그 이념」에서는 ‘예술도 군수품’이며, 예술가는 ‘전적으로 전시동원에 즉응하는 행동’을 하라는 일제의 전시 문화정책에 호응하여 ‘성전완수를 위하여 강력한 국민정신을 작여하라’면서 “회화의 교화적 효능을 통일된 사상으로서 표현하여 대상의 사상을 지도하자는 것이다.”라고 주장. 이와 같은 시국미술관에 걸맞게 군국주적 경향의 삽화나 그림을 그림. 개인적으로 그린 전쟁 선양의 작품으로는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흥아(興亞)를 지키다」와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 1944년 2월호의 속표지 그림 「기관총을 쏘는 병사」 등이 알려짐. 유화인 「흥아를 지키다」는 총칼을 들고 보초를 서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고 있음. 초소에서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대동아공영의 성전’ 승리를 꿈꾸는 병사의 표정이 결연하게 묘사. 「기관총을 쏘는 병사」는 연필소묘에 담채를 가한 소략한 삽화로 기관총을 중심으로 사수와 조수의 상반신을 그린 것. 예비탄창을 들고 웅크린 조수의 자세나 적을 향한 눈초리가 매섭게 표현.
- 각종 친일단체에서도 활동했는데, 1940년 12월 황도사상의 보급을 위해 결성된 황도학회(皇道學會)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 1941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여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의 서양화부에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사로 참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던 조선미술가협회에서 일본인 관료 화가들과 함께 조선인으로는 서양화부에 김은호 ․ 이상범 ․ 이영일(李英一)․ 이한복(李漢福)이, 조작부에는 김경승(金景承)이 평의원으로 선출.
- 1942년 11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여 첫 전람회를 가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김인승 ․ 김기창(金基昶) ․ 장우성(張遇聖)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서 제3회(1944)까지 참가. 여기에 출품한 작품들은 「방공훈련」,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 주로 군국주의에 호응하는 것들.
- 1943년 2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단광회(丹光會)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 단광회에는 당시 경성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를 포함하여 김인승•박영선(朴泳善)•김만형(金晩炯)•손응성(孫應星)•이봉상(李鳳商)•임응구(林應九)등이 참여. ‘미술보국’을 위한 대표적인 실천 사례는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이를 기념하는 기록화를 합동 제작하여 경성과 평양에서 순회전을 가진일. 단광회 회원 19명이 4개월 동안 제작한 조선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는 당시 ‘근대 반도사의 일면을 반영하는 대단히 큰 감명을 일으킨 역작’이라고 평가됨. 징병에 소집된 믿음직한 조선 청년을 중심으로 이를 전송하는 비행기를 든 소년과 조선군 보도부장, 지원병 훈련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장, 친일파 윤치호, 경기도지사 등 구체적인 인물들을 배치해 놓음. 이들 주요 인물들의 주변에는 경성 풍경과 남산의 신사(神社), 병사들의 행진, 시민들의 환송 장면을 그려 넣음.
- 1944년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에는 심사원으로 참여하여 「돌격전(突擊戰)」과 「전야(戰野)」를 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