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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과거사 청산 사례조사
작성일 2020.12.18
조회수 903
첨부파일
(1) 사례조사
- 국내외 순국유적지와 유사한 사례를 유형별로 조사 분석하여 시사점 도출
- 적용 가능한 방안을 정리하여 친일청산 유적지 활성화 계획 수립에 반영
- 근현대 주요 사건 발생지(건축물)의 현장성을 강조한 박물관과 기념관 사례 검토

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Seodaemun Prison History Hall
- 위치 :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 규모 : 대지면적 29,218㎡
- 주제 : 독립운동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수감 장소로 옥사를 그대로 보존함과 동시에 일부 옥사는 전시관으로 활용
- 시사점 : 독립운동과 민주화항쟁의 정신이 담겨있는 역사의 현장으로서, 자유 평화 인권 등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집약된 상징적 유적. 질곡의 한국근현대사를 증거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제10 제11 제12 옥사와 중앙사·사형장 등이 보존되어 있고, 최근 여옥사, 격벽장 등을 복원하는 등 3단계에 이르는 원형 복구 사업이 추진 중인 상태. 상설전시 외에 특정 기념일에 맞춘 이벤트, 기획전시, 기획 특강과 학술대회 등 다양한 전시·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함으로써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음. 일본 중국 등 외국인 관람객이 크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의 편의를 위해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진 외국어 해설사 제도를 운용하고 있음. 주변 일대에 조성된 서대문독립공원(근린공원)의 일부 시설로 포함되어 있으며, 연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방문객이 약 60만 명에 달함(유·무료 입장객)

② 난징대학살기념관 Nanjing Massacre Memorial Hall
- 위치 : 중국 장수성(江蘇省) 난징(南京)
- 주제 :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1월까지 6주 동안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게 약 30만 명이 학살당한 대참사에 관한 역사기록, 증언기록, 기념물 등을 전시
- 시사점 : 대량 학살이 자행된 유골 발굴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비극적 참상을 재현. 아파트 건립 공사 때 발견된 남경 강동문 집단학살 및 ‘만인갱’ 유골 발굴지를 활용하여 1985년 기념관 건립. 남경대학살 참사 70년이 되는 2007년 역사자료전시관 신축. 참상의 충격을 극대화시키는 구성과 규모의 거대함으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전시효과를 거둠

③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Buchenwald concentration camp
- 위치 : 독일 바이마르
- 규모 : 약 40ha(중앙수용소)
- 주제 : 나치의 대표적인 강제노동수용소로, 정치범 유대인 등 약 25만 명이 이 수용소를 거쳐 갔으며 수용자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 수용소 건물의 유구를 활용하고 강제노역장인 공장 1동을 복원 전시관으로 사용
- 시사점 : 당시 상황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상징적인 공간을 조성하고 조형물을 활용. 원형을 복원하지 않고 비극의 현장에 남아있는 흔적을 특별한 연출 없이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추모의 감정에 젖어들 수 있게 사유공간으로 구성. 수용자들의 의복, 생활용품, 일기와 노트 등 개인 유물과 수용소의 공식 기록물들을 상세하게 전시함으로써 비참했던 수용소의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



④ 오라두르 쉬르 글란 Oradour-sur-Glane
- 위치 : 프랑스 리무쟁
- 주제 : 1944년 6월 10일,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이 마을에서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가 대규모 학살을 감행, 주민 대부분이 살해당해 마을이 하루 만에 폐허가 되었음. 독일 패전 후 드골의 지시에 따라 만행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함. 제암리 학살 사건과 가장 유사한 유래를 지닌 ‘학살’을 소재로 한 기념시설
- 시사점 : 나치 독일의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을을 복구하지 않고 폐허 상태로 보존. 특별한 연출이나 추가 시설 없이 비극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나치의 반인도적 폭거를 효과적으로 입증


⑤ 도산공원과 도산안창호기념관 Dosan Ahn Chang-Ho Memorial Foundation
- 위치 :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20
- 규모 : (공원)대지면적 29,974㎡, 연면적 988㎡
- 주제 :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
- 시사점 : 근린공원 내에 관련 시설물로 기념관 배치, 주민친화형 기념시설. 망우리 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되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소를 이장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여 조성. 묘소와 기념관, 기념비, 동상, 어록비, 기념조형물 등으로 구성. 도심 속 공원과 소규모 기념관을 연계하여 방문객을 증가시킨 사례


⑥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KimKoo Museum & Library
-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임정로 26
- 규모 : 대지면적 18,364㎡, 연면적 9,682㎡
- 주제 :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백범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각종 기록과 자료 전시
- 시사점 : 기념관 인근에 효창원이 자리잡고 있음. 김구 선생 묘역, 삼의사 묘역(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안중근 의사 허묘, 임정요인 묘역(이동녕 선생, 차리석 선생, 조성환 선생) 등이 자리잡고 있어 역사탐방과 체험학습장으로 활용. 시설의 규모나 입지 역사성 등 유리한 여건에 비해 관람 빈도 등 활용도가 낮음


⑦ 제주 4.3평화공원 Jeju April 3rd Peace Park
-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
- 규모 : 대지면적 396,700㎡, 전시관 면적 3,891.83㎡
- 주제 :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데서 나아가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생과 화합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면서 평화와 인권의 상징 시설로 자리 잡음
- 시사점 : 민・관이 함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공원조성 추진. 기념관, 4·3희생자 발굴유해봉안관, 위패봉안소, 각명비, 행불자 표석 등으로 구성. 다목적 평화공원을 지향했으나 추모공원으로서의 상징성이 부각됨. 교통이 불편한 외곽지역에 위치하여 관람객 이용률 저하


⑧ 서대문독립공원 Seodaemun Independence Park
- 위치 :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247
- 규모 : 대지면적 109,193.8㎡, 전시관 면적 29,218㎡
- 주제 : 독립문과 독립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중심으로 조성된 역사공원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다 순국하거나 고초를 겪었던 애국지사의 독립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조성
- 시사점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공원으로, 사적과 교양시설 휴양시설이 조화되어 연간 300여만 명이 방문.
※ 사적 : 독립문(사적 제32호),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적 제324호), 독립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10-1-19). 기념조형물 : 순국선열 추념탑,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재필선생 동상




⑨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공원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 위치 : 독일 베를린
- 규모 : 대지면적 19,000㎡, 2,711개의 상징물
- 주제 : 나치의 반인도적 죄상과 유대인들의 희생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반성을 위해 건립, 구체적인 사실과 정보를 바탕으로 희생자들의 ‘기억’을 추상화하여 기록함
- 시사점 : 나치의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 숨져갔거나 고통을 겪은 수많은 유대인들의 희생에 대한 독일 사회 전체의 반성을 담은 기념시설로 공간 상징성을 부각시킨 우수한 사례.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베를린 중심부에 대규모 기념공원을 조성, 접근성이 뛰어나 관광객 방문율이 매우 높음. 지상에 기념공원, 지하에 전시공간과 추모공간, 정보센터로 구성. 추념비를 단순화한 형태의 지상 조형물과 희생자 묘소를 연상시키는 지하 전시 공간은 관람자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게 구성. 추모 및 전시공간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단순한 시각적 전달을 지양하고 어둠 속에서 육성 증언을 들려주는 방식 등으로 참상을 교감할 수 있도록 분위기 연출.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연계한 정보센터를 운영함으로써 유대인 학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여 관람객의 활용도를 높임


⑩ 위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
- 위치 :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
- 주제 : 전국애국주의 교육시범기지, 전국중점문물보호기관, 국가1급박물관, 전국중소학생 연구실천교육기지로 활용.
- 연혁 : 위만황궁은 원래 민국시기 길림성과 흑룡강성 2성을 관리하는 길흑권운국(吉黑權運局) 관서. 1932년 3월 9일 일본의 지지로 푸이(溥儀)가 ‘만주국집정(滿洲國執政)’을 맡았다. 1932년 4월 3일 푸이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만주국 집정부’로 됨. 1934년 3월 1일 푸이는 이곳 권민루(勸民樓)에서 등극식을 거행하고 ‘집정(執政)’에서 ‘황제’가 됨. 집정부(執政府)도 황궁으로 바뀌었고, 이후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위만제국 황궁은 비교적 큰 확장공사를 진행.
1954년 길림성박물관이 길림시에서 장춘시로 이전하면서 임시로 위만황궁의 동덕전(同德殿), 가락전(嘉樂殿), 서화루(書畵樓) 등을 관사로 사용. 1962년 7월 중앙선전부에서는 위만황궁을 문화부문 관할로 하고, 마지막 황제의 전반생과 일본제국주의 동북 침략 죄행을 전시하는 장소로 활용하라는 지침을 내림. 1962년 12월 1일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회에서는 ‘위만황궁 유적을 길림성문화국에 넘겨 전시관으로 사용할 데 동의’ 결정을 내림. 1962년 12월 24일, 길림성위황궁전시관이 설립. 당시 전시관 이름은 ‘일본제국주의 동북 침략 14년 죄행 전시관’. 1964년 7월 28일 중공길림성위 선전부와 길림성문화국은 길림성위황궁 전시관과 길림성 박물관을 합병하기로 결정.
1984년 위만황궁은 복원을 거쳐 대외에 개방되었는데 원래 면적의 10%밖에 되지 않음. 2000년 7월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인민정부에서는 위만황궁 유적을 장춘시에서 관리하도록 결정. 2001년 2월 길림성위황궁전시관은 ‘위만황궁박물관’으로 명칭 변경.
- 시사점 : 위만황궁박물관은 전시와 전람을 통해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동북을 침략하고, 동북 인민을 노역하고 박해한 죄행을 폭로하고, 위만주국 괴뢰황제 푸이(溥儀)가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죄행을 폭로함으로써 광대한 인민군중, 특히 청소년들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는 역할을 수행.

⑪ 만주중앙은행 본점 유적
- 위치 : 길림성(吉林省) 장춘시(長春市) 인민광장에 위치. 부지 3만㎡, 건축면적은 26,835㎡. 철근 콩크리트 구조로 지상 4층, 지하 2층으로 구성.
- 주제 : 일제 괴뢰 만주국의 화폐를 발행하던 곳.
- 연혁 : 1934년 4월 22일 착공해서 1938년 8월 6일에 완공. 이 건물 건축에 5천 톤 강재가 사용되었고, 만주국 화폐로 600만원 예산이 사용. 당시 ‘위만중앙은행’ 건물은 일본인들에게 아시아에서 가장 견고한 건축물로 불림. 만주중앙은행은 원래의 동3성관은호(東三省官銀號), 길림영형관은전호(吉林永衡官銀錢號), 흑룡강성관은호(黑龍江省官銀號), 변업은행사행호(邊業銀行四行號)를 합병한 기초에서 1932년 6월 15일에 설립되었고, 같은 해 7월 1일 정식으로 개업. 자본금은 3,000만원에서 8,000만 원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그 분점이 만주국 각지에 분포. 1945년 광복이후 ‘위만중앙은행’ 건물은 ‘중앙은행’ 건물로 이름이 바뀜. 건물이 아주 견고하였는데 이후 3년 동안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대가 최후의 보루로 삼고 완강히 저항하기도 함. 해방 이후 이 건물은 ‘중국인민은행 장춘시지행(中國人民銀行 長春市支行)’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됨. 1983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4년 만에 완공.


⑫ 관동군사령부유지(關東軍司令部遺址)
관동군 사령부는 일본이 중국 동북에 주둔시킨 관동군의 지휘기관이며, 일본 위만주국 대사관 소재지. 관동군 사령부는 선후하여 세 차례 이전.

[관동군 사령부 여순유지(關東軍司令部旅順遺址)]
- 위치 : 대련시 여순구구 태양구 만악가10호(大連市 旅順口區 太陽溝 萬樂街10號)
- 연혁 : 1906년 관동도독부 육군부로 되었다가 1919년 4월 12일 관동군 사령부로 바뀜. 1931년 9월 18일까지 선후로 9명의 관동군 사령관이 이 건물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중외를 놀라게 한 ‘9·18사변’은 바로 이곳에서 비밀리에 획책됨.





[관동군 사령부 심양유지(關東軍司令部沈陽遺址)]
- 위치 : 요녕성 심양시 중산광장 심양총공회 (遼寧省沈陽市中山廣場沈陽總工會)

- 연혁 : 1908년 일본정부와 상인이 합자해서 공동으로 특수한 성격의 금융기구를 설립. 1922년 심양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봉천지점이 설립. 1926년 일본인이 설계한 이 건물이 완공된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봉천지점은 여기로 이전. 1931년 9.18사변이 발생한 이후 9월 19일 관동군 사령부는 여순(旅順)에서 심양에 있는 이 건물로 이전.


[‘신경’일본관동군사령부구지(‘新京’日本關東軍司令部舊址)]
- 위치 :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 1983년 ‘신경’일본관동군사령부 옛터는 길림성인민정부로부터 제3차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 주제 : 관동군 사령부는 일본관동군 최고 권력기구
- 연혁 : 일본관동군 사령부 유적은 관동군 경리부에서 설계, 감독하고 오바야시구미(大林組)에서 시공을 맡음. 1932년 8월에 착공하여 1934년 8월에 완공되었는데 만주국 화폐로 170만원이 소요됨. 주 건물은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되었고, 양측은 4층, 옥상은 5층 구조. 부지 76,500㎡, 건축면적은 13,424㎡이다. 건물 가장 높은 곳은 31.50m이고 221개의 방으로 구성. 건물을 완공하는데 2년이 소요되었으며 동원된 인원은 30만 명에 달함. 1932년 10월 30일 심양에서 장춘으로 이전하였고 1934년 이곳에 입주. 1945년 8월 9일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일본군 남영(南岭)지하사령소로 이전.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 후 소련군 중국동북총사령부가 이곳에 주둔. 1946년부터 1948년 10월까지 국민당 신1군, 신7군 군부가 선후로 이곳에 주둔. 1948년 10월 장춘 해방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9항공학교가 사용하다가 1955년 중공길림성위에 귀속 사용됨.

⑬ 장영구지박물관(長影舊址博物館)
- 위치 : 창춘시 인민대가 55호(長春市人民大街55호) ‘만영(满映)’ 초기의 주소는 일본모직회사, 현재의 길림성건축설계원. 1939년 11월 홍희가(洪熙街) 602호에 새로 지은 건물은 당시 아시아 최대 영화회사. 바로 지금의 장춘시 홍기가 20호 (長春市紅旗街 20號)에 위치한 장춘영화촬영소.
- 주제 : 1937년에 원래의 ‘만영(滿映)’ 건물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수선하여 완성한 것으로서 장춘영화촬영소의 시작, 발전, 번영, 변천을 보여주는 예술의 전당. 장춘영화활영소 박물관 건축면적은 46,137㎡. 주식회사만주영화협회 (株式会社满洲映画协会, かぶしきがいしゃ・まんしゅうえいがきょうかい)는 위만주국이 설립한 영화기구로서 회사의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국가의 선전기구 특성도 있었음.
- 연혁 : ‘만영’은 설립초기 기술과 인원을 도호(東寶)에 많이 의존. 도호는 1932년 8월 12일 주식회사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으로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영화와 연극배급회사로 출발.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일본영화는 민족주의 정치를 위해 헌신하는 영화인들이 등장하였는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영화사가 바로 도호(東寶)임.
1938년 위만주국 민정부 경무사장으로 있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 이사장으로 취임. ‘만영’은 1941년에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는데 ‘우민영화’는 연간 30부를 제작하는 수준에 이르름. 1942년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일본 국내 영화필름이 고갈되자 기무라(木村庄十二), 우치다 도무 (内田吐梦) 등 일본 감독이 ‘만영’에 옴.
1943년 시마즈 야스지로(岛津保次郎)가 만영, 동보 합작으로 『나의 밤꾀꼬리』를 제작. ‘만영’이 존재한 8년간 장편영화 108부, 교육영화 및 기록영화 189부를 찍음. 『만영통신』 (일어판) 307호, 『만영시보』 (중국어판) 313호, 『만주아동』 55호를 편집 발행. ‘만영’은 대량의 ‘일만협화’ 선전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침략정책을 미화함으로써 위만주국통치 및 위만주국에서의 일본의 특수한 지위에 이롭게 함.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위만주국도 멸망. 당시 满映 이사장이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워 음독자살하였고 만영은 해체됨.




만주영화협회
장영구지박물관(長影舊址博物館)
장춘영화촬영소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1891.1.26. ~1945.8.20)
육군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1891.1.26. ~1945.8.20)
만영(滿影) 이사장
야마구치요시코(山口淑子), 중국명 이향란(李香蘭)
(1920.2.12.~2014.9.7)
만영(滿影) 배우, 가수


중공동북국의 지도로 1945년 8월 하순 동북영화기술자연맹과 동북영화연예인연맹이 결성. 9월 상반기 두 연맹이 합병하여 동북영화공작자연맹으로 불리게 됨. 1945년 9월 중순 만영 간사 와다히데요시(和田日出吉)가 연맹에 경영권과 자산을 넘김. 1945년 10월 1일 동북영화공사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중공이 직접 설립한 영화촬영소. 1946년 10월 1일 동북영화공사는 동북영화제작소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장춘영화활영소의 전신.

⑭ 용정일본총영사관 유적지(龍井日本總領事館 遺址)
- 위치 : 길림성 용정시(吉林省 龍井市), 현 용정시인민정부
- 주제 : ‘일본간도총영사관’ 및 그 부속 영사 분관은 일본제국주의가 침략정책을 추진하고, 연변지역 자원을 약탈하고, 항일 무장세력의 항일운동을 탄압하는 침략기관.
- 연혁 : 용정일본총영사관은 ‘간도일본총영사관’이라고도 불림. 1909년 11월 2일에 설립되었는데 1920년 11월 27일 화재로 소실된 이후 1926년에 새로 준공.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일본외무대신이 직접 장악하였고, 연길(延吉), 화룡(和龍), 혼춘(琿春), 왕청(汪淸), 안도(安圖) 등 시현을 관할. 영사관 내에는 방대한 무장경찰기구가 있었고, 감옥과 물감방 등이 있었음.
1937년 11월 5일, 일본제국주의는 위만주국과 체결한 『만주국에서의 치외법권 철회와 남만철도 부속지역 행정권을 양도할 데 관한 조약』에 근거하여 같은 해 12월 ‘간도총영사관’, 5개 영사분관과 경찰기구를 철회. 영사관 옛터에는 의과대학을 개설. 영사관 인원들은 모두 일본관동군 및 그 특무기관에 전입되었고, 경찰인원은 전부 위만주국 경찰기구에 편입. ‘특별수사반’은 ‘간도특별공작반’으로 개편되어 계속 죄악적인 활동을 감행.









2015년 11월 11일 항일전쟁승리 70주년에 즈음하여 용정시정부에서는 ‘간도일본총영사관’ 전시관 개관식을 거행. 현재 ‘간도일본총영사관’ 유적은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서 일제의 침략 증거로 남아 청소년과 대중들에게 반제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는 기지로 활용되고 있음.

⑮ 여순일러감옥구지박물관 (旅順日俄監獄舊址博物館)
- 위치 : 요녕성 대련시 여순구 (遼寧省大連市旅順口)
- 주제 : 1902년 제정 러시아가 건축하였고, 1907년 일본이 확장공사를 수행. 감옥에는 275개의 감방이 있고, 동시에 2,000명을 수용. 감옥밖에는 노역장, 임장, 과수원, 채소밭 등이 있었고, 수많은 중국, 조선, 일본, 러시아, 이집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구금 살해됨.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 흔적도 남아있음.
- 연혁 : 1907년 11월 일제는 여순감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공식명칭은 ‘관동도독부감옥서(關東都督府監獄署)’. 일제는 점차 감옥을 확장하여 감방, 병동, 검사실, 지하 감방, 공장 등을 확충. 1920년 ‘관동청감옥(關東廳監獄)’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벽돌가마, 채소밭, 임장, 간수 훈련소 등을 개설. 1926년에는 ‘관동청 형무소’, 1934년 12월에는 ‘관동형무소’, 1939년 ‘여순형무소’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45년 8월 15일 해체.
1970년 10월 여순시혁명위원회는 감옥 전면 보수공사를 결정하고 1971년 7월에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 1979년 3월 여순감옥 전시관은 취소. 1983년 6월 여순 제국주의중국침략유적보관소가 성립. 1988년 국무원으로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1992년 8월 여순 일러감옥유적전시관으로 명칭이 바뀜. 2003년 여순 일러감옥유적전시관은 여순 일러감옥유적박물관으로 명칭을 바꿈과 동시에 ‘대련시 근대사연구소’ 간판을 걸고 합병하여 업무를 보게 됨. 2005년 박물관은 중공중앙선전부로부터 ‘전국애죽주의교육시범기지’칭호를 받음. 2006년 국가국방교육판공실로부터 ‘국가급국방교육시범기지’칭호를 받음.






⑯ 요녕성 심양시 중산광장 (遼寧省 瀋陽市 中山廣場)
심양시 중산광장에는 1910년~1945년 사이에 선후로 유럽식, 일본식 건물이 8채나 건축. 금융기구가 이곳에 많이 집결되어있었기 때문에 중산광장은 ‘심양의 외탄’이라고 불리기도 함. 중산광장에 있는 일제시대 건물은 모두 보존이 잘 되어 있음. 심양철도공안국을 허물고 재건한 이외에 다른 건물은 모두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






[야마토여관(大和旅館)]
1927~1929년에 건축되었고, 일본남만철도주식회사가 건설하고 경영관리. 주요 건물은 7층 구조로 전형적인 유럽식 풍격. 이 건물은 당시 심양에서 가장 일찍 건축된 호화롭고 사치한 대형호텔. 일본관동군과 남만철도주식회사의 군정요인들이 주로 이용. 1931년 ‘9·18’사변 및 1932년 ‘4거물회의’와 만주국 성립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짐.





[요코하마쇼킨은행(横滨正金銀行) 봉천(奉天)출장소]



현 중국공상은행 중산지행으로서 중산광장 서쪽에 위치. 1905년 일본 요코하마쇼킨은행(横滨正金銀行)은 심양시내 중심가에 봉천출장소를 설치. 1921년 일본 조계 (남만철도 부속지역)에 전입하였다가 1925년 10월 다시 이곳으로 이전.

[야마토(大和)경찰서]
야마토경찰서는 중산광장 서쪽, 현 심양시 공안국 자리에 있었음 1906년에 건축되었으며 부지면적은 30,000㎡에 달함. 1931년 ‘9·18사변’이 폭발한 날, 봉천경찰서는 일본군이 심양을 공격하는 중요한 거점 중 하나로 됨. 1945년 항일전쟁 승리 이후 국민당정부는 이곳에 ‘동북비적토벌총사령부’를 설치.






[조선은행 봉천지점]

이 은행은 일제의 경제 침략을 수행하는 금융도구.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이후 이곳은 선후로 심양진공기술연구소(瀋陽眞空技術硏究所)와 화하은행(華夏銀行)으로 사용됨.
[미쓰이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
위치: 심양시 화평구 중산광장 중산로 108호(瀋陽市和平區中山廣場中山路108號)
연혁: 미쓰이물산회사는 1918년에 창건. 이 건물은 1937년에 준공되었는데 건축면적은 6,142㎡. 미쓰이재단이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瀋陽)에 설치한 민간은행. 초기에 일본미쓰이양행(日本三井洋行)이 사용하다가 후에 일만공군대루(日滿空軍大樓)로 명칭을 바꿈. 1948년 11월 심양이 해방된 이후에 요녕성전자국 소재지로 됨. 지금은 초상은행(招商銀行) 등이 업무용 건물로 사용. 1996년 7월 17일 심양시인민정부와 심양시문물관리판공실에서 심양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동양척식주식회사 봉천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봉천지점은 1922년에 건축. 1931년 9월 19일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여순에서 이곳으로 이전. 해방 이후 이 건물은 심양시 총공회 사무실로 사용. 앞면은 성경은행(盛京銀行).






⑰ 침화 일본군 731부대 죄증 진열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罪證陳列館)
위치: 흑룡강성 하얼빈시 평방구 신강대가 47호 (黑龍江省哈尔濱市平房區新疆大街47號)
건축면적: 9,997㎡
연혁: 침화일군제731부대는 1933년에 시작되었으며 세균전, 생체실험 등 전쟁범죄를 감행.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731부대는 도망하면서 대부분 건축물을 폭파. 731부대 유적은 세계역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세균무기 연구, 실험, 제조기지로서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유적. 현재 27곳이 남아있는데 그중 23곳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임. 1996년 12월 흑룡강성 국방교육기지로 선정, 2005년 국무원 공포 전국 100곳 전국홍색여유경전경구(全國紅色旅遊經典景區)에 등재, 2006년 국무원 공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2007년 전국문화유산보호공작선진집체, 2012년 9월 12일 제2차 국가국방교육기지로 선정, 2012년 11월 17일 중국세계문화유산 예비명단에 등재, 2014년 제1차 국가항전기념시설 유적명단에 등재. 2018년 7월 7일 항일전쟁 전면 폭발 기념일에 즈음하여 침화일군제731부대죄증진열관에서는 침화일군세균부대 북지갑제1855부대(北支甲第一八五五部隊) 부대원의 명단을 공포. 그중 1,242명의 실명과 개인정보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중국에서 처음 대규모로 1855부대원의 정보를 공개한 것임.










학술연구와 교육: 침화일군제731부대죄증진열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罪證陳列館)은 조직적으로 「침화일군 제731부대 옛터 조사와 감측보고 (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舊址調査与勘測报告)」, 「침화일군 제731부대 옛터 보호구 건설 항목 가능성 연구보고(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舊址保護區建設項目可行性研究报告)」를 편찬하여 「침화일군 제731부대 옛터 보호조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舊址保護條例)」 통과, 「침화일군 제731부대 옛터 보호규획(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舊址保護規劃)」 공포와 실시를 추진. 또한 731유적의 보호와 활용에 법률적 근거와 학술적 근거를 마련. 전시관은 선후로 4차례 731부대죄행국제학술토론회를 조직하여 해외에서 국제회의를 주최. 수차례 일본, 한국, 미국 등 나라에서 우호교류 및 학술심포지엄을 조직하여 731부대 죄행 및 731 유적 보호에서 거둔 성과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국내외에서의 지명도와 영향력을 높임.
731유적은 애국주의, 세계반파시스트전쟁교육의 중요한 기지로서 평화교육, 국방교육의 중요한 기지. 또한 역사를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중요한 기지이며, 중앙에서 확정한 ‘역사를 기억하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미래를 창조하자’는 정신을 체현한 중요한 유적. 매년 40만 명에 달하는 전시관 참관자 중 외국인이 10%를 차지. 매년 많은 해방군 지휘관과 군인들이 참관 방문하고 연합으로 활동을 진행함으로써 애국주의 교육과 국방교육기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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